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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 2012년 10월 29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유엔 세계 고아의 날(UN WorldphansDay) 제정 추진대회 개회식 및 심포지엄이 열렸다.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날 행사에는 한국과 일본 각지에서 온 1,000여 명이 국제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일본 개신교계 및 민간 단체 인사들도 상당수 참석한 이 자리는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 책의 옮긴이이자 윤학자 여사의 장남인 윤기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은 선친의 뜻을 이어 온 그간의 소회와 더불어 “어머니의 생일이자 기일인 10월 31일을 ‘유엔 세계고아의 날’로 제정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윤학자 여사를 기리는 여러 행사는 10월 30, 31일 목포에서 이어지며, 11월 7일 그녀의 고향인 일본 고치(高知) 시에서도 열린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헌신의 발자취 윤학자(尹鶴子, 1912-1968. 일본명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 여사는 일본 고치 시에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남 목포에 와서 부모님과 살았다. 야마테 소학교(지금의 유달초등학교)와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정명여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24세 때인 1936년, 은사 다카오 선생의 소개로 고아 수용 시설인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하게 되었으며, 2년 뒤 공생원 원장 윤치호(1909∼1951?)와 결혼했다. 1951년 1월, 식량 조달을 위해 광주로 떠난 윤치호가 행방불명이 된 이후 남편의 뜻을 이어 평생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 책에는 윤학자 여사의 이러한 삶의 자취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총독부 관리의 딸인 그녀가 학교 졸업 후 잠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목포 공생원 고아들을 돌보게 되고 ‘거지대장’ 윤치호와 결혼하기까지, 결혼 후, 특히 남편이 행방불명이 된 이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공생원의 초석을 다져 오기까지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가난과 질병 등 고아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현실과 싸워야 했던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시련과도 맞서야 했다. 그러한 그녀의 일상의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녀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녀를 ‘어머니’로 여기며 따르던 많은 고아들과, 이들을 위해 힘을 모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시련 그리고 믿음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힘이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통해 심어진 신앙심이다. 말씀과 찬송과 기도가 그녀의 일상의 바탕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신산(辛酸)한 삶의 굽이굽이에서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도움의 손길을 뻗치며 역사하셨음을, 이 책의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그녀의 삶은 언젠가 자신이 말했듯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언젠가는 영광으로 이어질 나의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걸어간 것이었다.
한편, 윤학자 여사는 1963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1965년에는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藍綬褒章)을 받았다. 1968년에는 전라남도 도지사로부터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으며, 1969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5등보관장(勳五等宝冠章)이 추서되었다. (*목포공생원 www.mksw.org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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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 사랑은 국경을 넘어/ 사진으로 보는 윤학자 여사의 모습
어린 시절에서 공생원에 이르기까지 프롤로그 1. 어두운 역사 속에서 2. 섭리의 질병 3. 윤치호의 사람이 되어 4. 목포 공생원 설립 5. 일본어와 음악 선생이 되어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6.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7. 반일운동 투사를 숨겨 주다 8. 결혼 9. 출산 그리고 성별(聖別) 10.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 11. 친어머니가 되어 12. 계속되는 시련 13. 기념식
시련을 넘어 14. 동족상쟁 15. 인민재판 16. 또 하나의 시련 17. 실종 18. 당신이 남긴 뜻
진주의 노래 19. 원생들의 출정 20. 함태영 부통령의 방문 21. 고민할 때 큰 힘이 되어 22. 성윤이의 죽음과 사회부장관과 23. 진주의 노래 24. 영광의 개선 25. 목포는 울었다 26. 충실해진 공생복지재단 사업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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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반드시 치즈코가 아니면 안 되는 사명을 준비하고 계실 거다. 지난번에도 목사님이 ‘희망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지만 실망은 악마가 갖고 있다’고 하셨잖니.” “그렇군요. 어머니!” 치즈코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처럼도 생각되었다. 아무튼 그녀는 “하나님! 저에게 목숨을 걸 만큼 보람 있는 일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2. 섭리의 질병, 51쪽)
◀주여! 이 종은 당신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밤을 꼬박 새며 기도하다 그는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는 치호의 결심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일해야지, 만약 이대로 아이들을 버린다면 겨울을 지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아이들을 위해 흘린 것이다. 아이들과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임이 분명했다. 치호는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마음도 가벼워졌다. (4. 목포 공생원 설립, 70-71쪽)
◀‘그렇다. 저분은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아무 일도 못 하더라도 저분의 구혼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일본이 범한 수많은 범죄에 조금이라도 속죄하자. 설령 이것이 고난의 길이고 또 아이가 없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저분이 말한 대로 공생원 아이들을 내 아이라 믿고 고아들을 키우는 데 생애를 바치자. 다카오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가 없으면 월계관도 없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언젠가는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다.’ 치즈코는 이렇게 결심하고 먼저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했다. (8. 결혼, 109쪽)
◀“…이제 제막하는 이 기념비는 이 나라의 어떤 비보다도 뜻깊은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기념비는 윤치호 원장 부부가 피와 땀과 눈물로 보낸 20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공생원을 이끌어 오는 20년 동안 윤 원장 부부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윤 원장의 숭고한 뜻이 오해되어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공생원 원생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학대받고 멸시당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 원장 부부는 그 모든 시련을 묵묵히 견뎌 냈습니다. 욕하는 사람 앞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 앞에서 오로지 고아들을 돌보는 사랑의 정신만으로 수많은 생명을 지켜온 것입니다.” (13. 기념식, 176-177쪽)
◀“여보, 그래요.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내게는 이 아이들……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아이들이 있었어요.” 학자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아이들을 부탁해요!”라고 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쟁쟁했다. “여보,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나는 당신의 뜻을 따라 이 아이들을 돌보겠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해 오신 당신의 뜻이 오래오래 빛나도록 제가 이 아이들을 돌보겠어요.” 학자는 두 주먹을 힘 있게 쥐었다. (18. 당신이 남긴 뜻, 220쪽)
◀해변의 진주조개는 거친 파도에 실려 오는 딱딱한 모래알이 껍질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여기저기 상처가 생긴다. 조개는 이 이물질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이물질은 속으로 점점 파고든다. 그래서 진주조개는 이 이물질을 아예 동화시키기 위해 진주질을 분비해서 아름답고 빛나는 진주를 만들어 낸다. 학자의 생애도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온갖 시련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견디어 냈다. (23. 진주의 노래, 272쪽)
◀윤 여사는 떠났습니다만, 윤 여사가 남긴 사랑의 정신은 목포 시민은 물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유달산 산록에는 윤 여사의 따스한 손길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윤 여사가 손수 키운 3천여 명의 고아들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가슴에 묻은 채 그 족적을 따라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25. 목포는 울었다, 29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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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모리야마 사토시(森山諭, 1908~1996)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사이자 학자. 후쿠시마 현 출신.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폭거를 목격하고 그 실상을 일본 사회에 고발했다. 이후 한·일 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76년 ‘목포공생원 마음의고향 어버이협력회’를 창립하고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에는 ‘일·한 친선 선교협력회’를 만들고 회장을 역임했다. 저자의 명저로 평가되는 《신도(神道)와 불교를 밝힌다》에서 일본 왕실의 조신(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신공황후(神功皇后) 등을 비롯, 일본 역사상의 유명인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옮긴이/ 윤기(尹基, 1942~ )
목포에서 태어났다.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를 졸업하고 1968~1977년까지 목포공생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 사회복지법인 공생원이 공생복지재단으로 개편되면서 회장으로 일했다. 1982년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를 개설한 뒤 1989년 일본 오사카 부(府) 사카이 시에 재일동포 고령자를 위한 노인 홈 ‘고향의 집’을 세웠으며, 이후 오사카, 고베, 교토 등 모두 네 곳에 ‘고향의 집’을 건립했다. 2000년 마이니치(每日) 신문사로부터 사회복지상을, 2006년 호암재단으로부터 제16회 호암상(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0년 사카이 시 제정 제2회 자유도시・사카이 평화공헌상 대상(大賞)을 받았다.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으로 있다. 저서로 《어머니는 바보야》(홍성사), 《김치와 우메보시》(예지), 역서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예지), 《고령 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공생복지재단)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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