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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테너 박인수의 삶과 음악
박인수 저 I 지성과영성 I 201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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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  신국판 변형(145×210mm),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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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는 훌륭한 음질과 영웅적인 폭을 가진 테너다”
<뉴욕타임즈> 1972. 12. 17

☞ 미국과 캐나다, 남미와 유럽에서 주역 테너로 활동
☞ 1983년 귀국해 20여 년간 모교인 서울대에서 제자 양성
☞ 3백여 회의 오페라 주역과 2천 회를 넘긴 왕성한 콘서트 활동
☞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대중음악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 국민 테너 가수
☞ 박인수 교수 애창곡 CD 포함

국내외 오페라 무대에서 3백여 회 주역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2천여 회의 개인 콘서트를 개최하여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테너 박인수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집 《테너 박인수의 삶과 음악》이 출간됐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 남미의 오페라 무대에서 크게 성공하고 1983년 귀국해 20여 년간 모교인 서울대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62년 슈만의 <시인의 사랑> 전곡으로 독창회를 개최해 데뷔한 후 지금까지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며 지난해 데뷔 5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갖은 바 있다.
이 책에는 테너 박인수의 어린 시절부터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의 주역 테너로 활동한 이야기, 국민가요 <향수>를 부른 이 후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는 등 그가 겪은 이야기, 50대초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벨칸토 창법을 연구 적용해 재기한 후, 그 방법으로 가르쳐 세계 주요 메이저 오페라 극장을 비롯한 국내외 오페라 무대 및 대학 강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을 길러 낸 이야기, 그가 만난 역대 대통령들과의 일화, 그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과의 인연,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이끌어 온 하나님의 섭리 등 그가 살아온 성악의 외길인생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1부 _성악의 길로 들어서다
수줍은 소년이 오페라 가수가 되기까지

목사님의 안수를 받고 들어선 성악의 길_ 11
평생의 반려자 안희복을 만나다_ 18
신혼의 단꿈을 깨운 가난과 좌절_ 25
중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재기하다_ 30
출생 배경과 유년기_ 38
미아리 오형제파의 두목_ 45
박 병장, 너 바지 벗어_ 52


2부 _세계무대에 서다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의 주역이 되기까지

세계를 향해_ 61
본격적인 오페라 가수로_ 71
에밀레 오페라단의 창단과 아내의 반란_ 77
서울대 교수가 되다_ 82




3부 _좋은 소리를 찾아서
강단과 오페라 무대에서 대중 속으로

실패로 끝난 귀국 독창회_ 91
<향수>가 바꾸어 놓은 운명_ 96
순수음악과 대중음악_ 105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_ 115
벨칸토 창법의 복원_ 122
나의 제자들_ 130
득음을 위한 소리연구회_ 140


4부 _내가 만난 사람들, 나누고 싶은 이야기
음악과 함께한 인생의 여정

스캔들의 진상_ 155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_ 166
삼성가(家)와의 인연_ 175
미식가 클럽_ 182
내가 좋아하는 맛집_ 192
사랑에 빚진 분들_ 209
에필로그 내가 걸어온 음악 행로_ 225
 
 
조지 쉬크 총장은 대학 오페라뿐 아니라 프로 오페라단에 주역으로 나를 추천해 주었다. 오페라 출연이 많아진 관계로 연습하느라고 클래스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학점을 딸 수가 없었다. 총장을 찾아가 한국에서는 학위가 필요한데 당신이 오페라를 자꾸 시켜 클래스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으니 그냥 학위를 달라고 졸랐다. 그는 즉답을 피하고 오페라 가수가 좋으냐, 교수가 더 좋으냐고 반문했다. 나야 물론 오페라 가수가 좋다고 했더니 “그럼 오페라 가수 해. 학위는 왜 따? 계속 장학금과 생활비는 줄 테니까. 그리고 매니저도 소개해 주고 프로 오페라단에 추천도 해줄 테니 그냥 오페라 가수 해.”라고 했다. 총장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학위는 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시스템이다.
2부 「세계무대에 서다」의 ‘세계를 향해’ 중에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대중음악이 양분된 것이지, 클래식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이 더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해서 대중과 유리된 것은 아니며 엘리트 중심의 지배 구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2부 「세계무대에 서다」의 ‘순수음악과 대중음악’ 중에

카루소, 질리 등 당대의 유명한 가수들도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 플라시도 도밍고 역시 존 덴버와 듀엣으로 <퍼햅스 러브>, <애니의 노래> 등 발라드를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대중가수가 된 것은 아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내는 것이나 젖소가 풀을 뜯어먹고 우유를 생산하는 것처럼 그들은 유행가로 클래식 음악을 만든 것이다. 또한 그들이 대중적인 인기에 편승하여 음악가의 본문을 망각한 것이라고 매도한다면 난센스다.
2부 「세계무대에 서다」의 ‘순수음악과 대중음악’ 중에

대중음악을 평소에 즐기면서도 왠지 격이 떨어지고 저급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대중음악의 벽이며, 클래식은 고상하고 격조가 높은 것이어서 그 순수한 혈통을 엘리트 집단이 지켜 나가야 한다는 선입견이 클래식음악에 대한 벽이다. 이것이 허물어지지 않고는 클래식은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2부 「세계무대에 서다」의 ‘순수음악과 대중음악’ 중에

1989년에 <향수>가 히트를 하고 나니 오페라단 내부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향수>를 취입한 후 이동원과 함께 70분짜리 쇼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몇몇 사람에 의해 문제 재기가 된 것이다. 쇼프로그램에서 이동원이 노래하는 파트에서는 KBS 경음악단이 반주를 맡았고, 내 노래 파트에서는 현재 서울대 김덕기 교수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반주하고 듀엣 부분에서는 합주로 하는 형식이었다. 방송국에서도 나름대로 굉장히 신경을 썼는데, 이것이 클래식 모독이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대중가수와 함께 노래하는 게 고전음악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클래식을 클래식답게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클래식에 대한 진짜 모독이다.”라고 대답했다. 대중들도 이런 획기적인 형식을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좋아해 주었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향수>가 바꾸어 놓은 운명’ 중에

공연장에서 <농부가>, <임당수>, <박연폭포> 등은 관객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받았다. 연주 때 오페라 <아리아>와 서양가곡, 민요 등 여러 장르의 곡을 같이해 보면 언제나 민요를 부른 후에 박수가 제일 많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관심했다. 성악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작곡 하는 사람들도 서양음악에 경도되었거나 고정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 잡혀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중에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다음 해인 2004년에 유럽순회 공연을 했다. 런던, 파리,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밀라노 등 6개 도시였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1, 2부로 나누어 1부는 내가 민요, 판소리를 하고 2부는 이미 유럽에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 등 서양음악으로 꾸몄다. 밀라노에서 어떤 음악가가 찾아와 “너희 것으로만 하지 그랬느냐? 그랬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 깨달은 것이 나도 사대주의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우리 것으로만 할 수 있었는데 우리 가수도 이만큼 좋고 우리도 너희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객기가 무의식적으로 발동했다. 그때 내가 새삼 느낀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에 접목시킬 때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중에

19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가까운 친구들이 “인수야, 너 노래 그만 해야겠다. 네 목소리 갔어. 그러다가 불명예 제대한다.”라는 충고를 했다. 나는 고음 가수로 고음을 잘 내었다. 그런데 중고음도 못 내어 스스로도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여러 날 고민 끝에 ‘정말 관둬야 하나? 나이도 50이 넘었고 남들도 그 나이면 은퇴하는데.’ 하고 자위했다. 그날 밤 옛날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벨칸토 황금기 시절 가수들은 5~6년 동안 테크닉을 마스터하면 죽을 때까지 젊은 목소리로 노래했다는 구절이었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벨칸토 창법의 복원’ 중에

창법도 우리가 웃고, 울고, 말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누가 웃을 때 입을 세로로 벌리고 웃는 사람이 있는가. 아래위로 벌리고 웃으면 그만큼 헛김이 빠진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가수가 아래위로 입을 벌리고 노래한다. 선생들이 옆으로 벌리지 못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때 파바로티와 대중가수들의 발성이 실제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벨칸토 창법의 원리는 스피킹 보이스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내추럴한 발성이다. 그런 면에서는 벨칸토 창법의 원리는 클래식 성악가들보다 대중가수들이 더 이어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말하듯이 노래한다. 마이크는 쓰지만 그냥 마음대로 올라가고 마음대로 표현한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벨칸토 창법의 복원’ 중에

나는 성악을 공부하러 외국에 유학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서 배울 것도 없거니와 시간적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다. 성악 공부를 시작하는 시점을 변성기가 지난 15세 때라고 볼 때, 19세쯤 대학에 입학하고 23세에 졸업하면 8년을 공부하는 셈이다. 그 후 유학을 가서 평균 7년을 공부한다고 치면 15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학위 따는 데 소비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투자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목소리가 더 나빠져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뻔히 보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버리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가.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의 ‘득음을 위한 소리 연구회’ 중에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비서들이 몰려와서 재차 “무슨 말씀을 하실 건지 요점이라도 말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라고만 했더니 그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청와대 공연은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음악회라는 타이틀이어서 근로청소년들도 초청되었다. 국회의원과 장관들도 함께 초청되었다. 공연 30초 전 무대에 올라가려는 나에게 비서들이 일렬로 서서 “잘 부탁합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제발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 달라는 통사정이었다.
4부 「내가 만난 사람들,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중에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맛’이라는 표현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리하는 주방 시설도 변했고, 재료도 달라졌고, 만드는 사람도 바뀌었는데 어찌 맛이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그 맛을 지키려는 주인의 남다른 노력과 맛을 알아주는 손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음식 맛이란 음악처럼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의 합작품이다. 한 마디로 서로 궁합이 잘 맞아야 하는데, 수많은 맛집들 중에 이런 집은 그리 많지 않다.
4부 「내가 만난 사람들,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미식가클럽’ 중에
 
 
1부 성악의 길로 들어서다 / 2부 세계무대에 서다 /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 / 4부 내가 만난 사람들, 나누고 싶은 이야기 등 총 4부로 나눈 이야기를 통해 박인수 교수가 반세기 동안 걸어온 음악 생애를 말하고 있다.

1부 ‘성악의 길로 들어서다’에는 마도로스가 되려던 그가 목사님의 안수를 받고 성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아내 안희복을 만나 어렵게 결혼한 에피소드, 신혼 초 생활고 때문에 간장 장사, 양송이재배, 포장마차까지 했던 일, 서울대 재학 중 국립오페라단의 <마탄의 사수>에서 주인공 ‘막스’ 역에 발탁되었으나 언론으로부터 일제히 혹평을 받고 좌절했던 일, 중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재기한 사연 등을 담았다.
2부 ‘세계무대에 서다’에는 선배 한 사람이 우연히 미국으로 가져간 그의 노래 테이프 때문에 미국에 초청된 이야기, 줄리아드 음대의 오디션에서 마리아 칼라스에게 발탁된 이야기, 맨해튼 음대에서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바 있는 조지 쉬크 총장를 만나 그의 추천으로 미국 오페라 무대를 비롯한 세계 오페라 극장의 주역으로 진출한 이야기, 뉴욕에서 소수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에밀레 오페라단을 창단했던 이야기 등이 기술되어 있다.
3부 ‘좋은 소리를 찾아서’에는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로 국민가수로 불릴 만큼 유명해졌으나, 클래식 음악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한 이야기와 이로 인해 야기된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본질에 대한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대중들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무관심과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의 노령화 등으로 클래식 음악의 수요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공급되는 음악의 질도 저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오페라만 보더라도 카루소 이후 점점 질적인 저하가 이루어졌고 파바로티 이후에는 더욱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사회적 변화에 따라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들의 지위가 상당히 향상되었으며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조차 티켓을 사서 음악회에 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클래식 하는 사람들이 고정관념과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스스로의 입지만 옹색하게 만들뿐이라고 주장한다.
클래식 음악의 사양화를 재촉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외국에 유학하여 학위만을 취득하려고 하는 학위지상주의를 꼽으면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필요 없는 이론을 공부하느라 정작 본질인 음악을 연주할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며, 학위논문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이론이지 음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성악을 공부하러 외국에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학위 따는데 소비하고도 대부분 목소리가 더 나빠져서 돌아오는데,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한다는 것은 범죄행위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음악은 고전음악, 대중음악, 국악의 세 부분이 서로의 본령을 지키면서 서로의 벽을 헐어 융합하고 발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므로 클래식 음악도 소리가 좋아지면 떠났던 청중들이 다시 돌아 올 것이라며 근본과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50대 초 그가 고음을 잃어버려 은퇴를 고심하던 중 옛날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상기했다고 한다. 그 책에는 벨칸토 황금기 시절의 가수들은 5~6년 동안 테크닉을 마스터하면 죽을 때까지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다는 것에 착안해 본격적으로 벨칸토 창법을 연구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실험하여 재기하게 된 이야기와 1993년부터 제자들에게도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들 중 세계 5대 메이저 오페라극장의 주역으로 김재형, 이용훈, 신동원, 정호윤이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 오페라 무대 및 대학 강단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4부 ‘내가 만난 사람들,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는 성악가 박인수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 톱스타 C양과의 염문설의 진상,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등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뛰어난 미식가인 그가 추천하는 맛집 등이 소개되어 있다. 끝으로 내가 걸어온 음악행로에서 참 소리를 얻기 위해 그가 걸어온 외길인생을 회고하면서 좋은 소리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그의 오늘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끌려 왔다고 고백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섭리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박인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반세기를 음악과 함께 살아왔으며 2012년 가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데뷔 50주년 기념음악회를 열었다.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졌다. 현재는 백석예술대학교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중이다. 경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와 줄리아드 오페라센터를 거쳐 맨해튼 음악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과 캐나다, 남미와 유럽에서 주역 테너로 성공을 거두었다. 20여 년간 모교 서울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300회 이상의 오페라 주역과 2000회를 훌쩍 넘는 독창회 개최 등 성악계의 큰 스승으로 인정받아 왔다. 그는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벽을 허문 진정한 화합의 목소리로 주목받으며, 후학 양성과 함께 끊임없는 콘서트 무대를 통해 클래식 대중화에 기여해 왔다.
음악의 존재 가치는 객석에 감흥과 감동을 주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더욱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듣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무대라도 기꺼이 선다.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리를 유지하며 지금도 끊임없이 연주회를 가질 만큼 식지 않는 열정의 예술인이다.
1997년 문화체육부 한복애용자 표창 대상, 2011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 서울대학교 성악과 졸업
● 줄리아드 음악학교 마리아 칼라스 장학생
● 맨해튼 음악학교 장학생
● 1983년~2003년 서울대 음대 교수
● 2003년 정년 퇴임
● 2004년~ 백석예술대학교 석좌교수
● 국내외 각종 오페라 300회 이상 주역 출연
● 국내외 독창회 2000회 이상 개최
● 서양음악과 국악과의 만남을 시도
● 불우이웃을 위해 수많은 자선무대 출연
● 1991년, 1994년 방송대상 수상
● 2011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 수상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외교통상부 공연예술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역임
● 나눔실천운동본부 공동대표
● 현 백석예술대학교 석좌교수. 명예 음악학 박사
● 현 백석예술대학교 음악대학원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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