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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박재순 저 I 홍성사 I 201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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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우리 철학, 우리의 생각 365일 묵상집!


1. 우리의 ‘생각’ 365일 묵상
철학계의 올림픽이라 할 세계철학대회가 2008년,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대회의 주제는 ‘동서 철학 전통의 만남과 융합’이었고, 유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을 소개하는 특별분과가 열렸다. 다른 분과의 수강생은 서너 명에 불과했지만 유영모·함석헌 분과에는 800여 명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졌고 이후 유럽과 일본에서는 씨사상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철학이 없어 더욱 불행했던 시기라고 하는 우리의 20세기는 유영모와 함석헌이라는 두 사상가를 숨겨 놓았다.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는 《다석일지》, 《다석강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 두 거장의 저작에서 알짬을 뽑아 해설을 덧붙인 365일 묵상집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을 한 두 사상가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글을 발표해 온 박재순 씨사상연구소 소장이 해설을 붙였다.

2. 세계애 내놓을 우리의 철학가 유영모·함석헌
다석(多夕) 유영모.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사상, 천문·지리에 능통한 사상가이자 철학가였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6세에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나 1912년 톨스토이를 연구하면서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우리말과 우리글로 독창적 사유를 한 철학가로 평가받고 있다. 1940년대부터 하루 한 끼만 먹는 생활을 하였으며, ‘세 끼를 합쳐 저녁에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이라 하였다. 1955년부터 만년까지 《다석일지》를 기록하였고, 날수로 33,200일을 살고 1981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을 당한다. 이후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평생의 스승 유영모를 만난다. 오산학교 졸업 후,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1927년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으며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1938년까지 교사로 재직한다. 〈성서조선〉에 그의 주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다시 출간됨)를 연재하였고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권유로 〈사상계〉를 통해 글을 발표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 투옥되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집권군부세력에 맞서며 반독재운동에 앞장선다. 1970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며, 1979년과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다. 1989년에 별세하였다.
 
 
 
 
▶산을 옮기자 해서 산더러 여기서 일어나 저 바다 속으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내가 나더러 옮겨 가라고 명령을 해야 옳은 일이다. 어디로 옮겨 가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됨이다. 내가 산 같은 나를 바다같이 무한한 하나님 속에 던져 하나가 돼버리면 산을 마음대로 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믿으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면) 된다(물건이 나와 하나 된다). 다 됐다. (《함석헌 전집 5: 서풍의 노래》 317쪽)
하나님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아우르며, 모든 것의 속의 속에, 깊이의 깊이에 계신다고 믿어지는 이에게 가까이 가면, 그이와 하나로 되면 모든 물건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또 모든 물건들과 하나로 될 수 있다. 그러면 매임 없이 기쁘고 힘이 난다. 물건과 일에서 자유로우면 나를 맘대로 움직일 수 있고 물건과 하나로 되면 물건과 일을 제대로 이끌 수 있다. _‘1월 4일―믿으면 된다’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생각이 꽉 차서 절로 나오는 감동이 찬송이 되어야 하고 그 말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된 생각이 여물어져 하나님과 일치되는 생각을 하게끔 되어야 찬송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그 밖에는 거짓된 것이라 필요가 없다. 기도와 찬송이 우리가 인사치레하는 것같이 하고 있으니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석 유영모 어록》 28쪽)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분명히 느끼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송이 참된 기도요 찬송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고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데 참된 기도와 찬송이 나올 리 없다. 기도와 찬송이 그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속삭임이요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면 기도,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
_‘2월 18일―참된 기도와 찬송’에서
 
 
 
 
박재순은 1950년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문리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았고 독재정권의 억압과 최루탄 가스가 싫었다. 대학 졸업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한울공동체 사건으로 다시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책 읽고 공부하며 생각할 시간을 넉넉히 가질 수 있었다.
1974년 가을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자유롭고 실천적인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로부터 카를 바르트 신학을 배웠다. 학사·석사학위 논문은 카를 바르트 신학, 박사학위 논문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으로 썼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카를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1980년부터 안병무 박사가 세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면서 국제성서주석 번역을 하였다. 독일 성서주석서 폰라트의《창세기》, 요아힘 그닐카의《마르코복음》I, II, 독일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의《사랑과 노동》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당시 한신대학교에서 해직 상태였던 안병무 박사는 매주 1~2회 연구소 직원들에게 성서와 신학에 관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으며, 연구소 번역실에서 아홉 살 어린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민중신학, 생명신학, 씨사상 연구에 몰두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하여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게 된 것은 보람이고 사명이었다. 함석헌은 그가 만난 가장 뛰어난 인물이고 위대한 정신이었다. 씨ㅋ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낸 박재순은 2007년 재단법인 씨을 설립하고 씨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사상》,《다석 유영모》,《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유영모·함석헌의 철학과 사상》(공저),《모색: 씨철학과 공공철학의 대화》(공저),《씨·생명·평화》(공저),《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사상》,《한국생명신학의 모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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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내 이름은 아직도 이새별
고통의 문제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