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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믿음을 찾아서
알리스터 맥그라스 저 I 두란노 I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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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  145 * 210 mm, 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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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의 뒤를 잇는
복음주의 대표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작!

‘확실성’을 찾아 표류하는 이 시대
불안을 뚫고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의 신비

“신비하고 매혹적이며 때로는 압도적이다!”
세상과 나를 바로 읽고 이해하는 지성의 제자도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언제나 엄청난 학식을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인 문체에 담아낸다.”
_로완 윌리엄스 (케임브리지대학교 모들린칼리지 학장)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1970년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자신의 과학적 무신론이 실재를 이해하게 해 주는 데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내놓는 ‘큰 그림’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에 직면했다. 마지못해 기독교로 회심한 그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상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기쁨을 맛보고 크게 놀랐다. 그의 기독교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신경’(信經, Creed)이었다. 그는 신경을 믿음의 풍경을 보여 주는 지도로 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경이 가리키는 보물을 독자들도 빠짐없이 파악하고 발견하기를 바란다. 우리 존재의 근거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길에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고 우리를 인정하시는 성령님이 바로 그 보물이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발견한 것은, 어느 신비한 섬의 해변으로 떠밀려 올라가
섬의 풍경을 탐험해야 하는 상황과 같았다!”
세계적 신학자가 내놓은 생동감 넘치는 기독교 신앙 탐험기!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발을 내디딘 탐험자를 위한 풍경 안내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독자들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섬에 대한 나름의 지도를 만들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것을 위해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여행하면서 발견한 것과 그것을 내 신앙의 ‘큰 그림’의 일부로 삼게 된 과정을 들려준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상상력에 호소하는 기독교의 힘과 비전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이 책은 C. S. 루이스, G. K. 체스터턴, 도로시 L. 세이어즈 같은 탁월한 저술가들의 신학을 활용하며, 이야기와 풍부한 예증으로 가득하다. 목회자, 교회 지도자, 신학생은 물론,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프롤로그. ‘믿음’이라는 미지의 섬에 발을 내딛다

1부. ‘세상’과 ‘나’를 옳게 읽고 싶었다
― 탐험이 시작되다

: 좁은 ‘합리주의’의 우리를 빠져나오다
1. 지금껏 경험한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 탐험을 도와줄 최적의 준비물
2. ‘신경’이라는 지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 진부한 교리 요약본이라는 편견
3. 신경,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도인가

2부. 하나님을 찾아서
― ‘살아 계신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에 대한 핵심 이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
4.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분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다는 결단이다

: 반석 하나님
5. ‘나’라는 존재의 근거이시다

: 아버지 하나님
6.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 창조주 하나님
7.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

: 하나님과 인간 본성
8.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3부. 예수를 찾아서
― ‘주요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죄인’에 대한 핵심 이해

: 예수의 정체성
9. ‘역사적 지도’와 ‘신학적 지도’를 겹쳐야 온전히 보인다

: 예수의 성육신
10. 길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와 연대하신다

: 예수의 속죄
11. 죄로 틀어진 내 운명, 죽음으로 바로잡으셨다

: 예수의 고난
12. 내 슬픔을 온통 짊어지셨다

4부. 성령을 찾아서
― ‘내 안에 사시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에 대한 핵심 이해

: 은혜의 성령
13. 알아서 굴러가라고 방치하는 신이 아니다

: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14. 하나님의 신비를 보존하다

: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15.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마음의 눈’이 치료되다

: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삶
16. 어제와 내일을 이어 주어 ‘지금’에 갇히지 않게 하다

: 영생과 그리스도인의 삶
17. 다함없는 천국 소망을 보고, 붙잡고, 그 빛 아래서 살라

에필로그. 불안의 시대, 마침내 ‘믿음의 섬’에 정착하다
감사의 글
 
 
<43-44쪽 중에서>
‘믿음의 풍경’이라는 이미지는 기독교 전통 안에 깊이 박혀 있고 성경 자체에 근거한다. 출애굽과 약속의 땅으로의 진입, 바벨론 유배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다루는 성경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대 근동이라는 물리적 풍경을 여행하는 모습을 그려 보게 한다. 하지만 세상을 통과하는 여행에 대한 이런 묘사는 하나님의 임재와 행위라는 더 심오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상태에서 봐야 한다. 우리는 이 땅을 지나는 순례자이자 잠시 머무는 체류자이기에, 우리가 여행하는 물리적 풍경과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여러 정보를 주고 여행 중에 처하는 상황을 해석하도록 돕는 상상 속 신앙의 풍경을 결합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 믿음의 풍경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마지막 부분에서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라고 이것을 표현했다). 믿음의 풍경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다소 단조롭게 제시되었으나) 여러 신경에 합의된 정통 기독교의 틀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신약성경이 시력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신앙을 통해 갖게 되는 영적 분별력’과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조건’을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시력에 손상을 입은 탓에 사물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보지 못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세상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리 눈에 드리운 베일을 벗겨 내야 한다.

<67-68쪽 중에서>
신경에는 열망과 초대가 담겨 있고, 우리가 그 개별 주제들을 탐험하고 그 주제들을 아우르는 더 큰 실재를 발견하도록 틀을 제공한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사용한 이미지를 빌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탐험해 볼 방이 많은 대저택과 같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현관홀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는다. 신경은 이 믿음의 저택의 지도를 그려 주고, 그 많은 방에 친숙해지고 그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 보라고 권한다.
신경의 아주 중요한 기능은 “내가 보는 기독교는 이렇다. 따라서 이것이 기독교의 본모습이다”라는 식의 개인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나름의 개인적 신조가 있고, 그것은 우리의 필요에 부합하지만 우리의 시각과 관심사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광대한 풍경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버거운, 한 개인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다. C. S. 루이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적 틀에 들어감으로써 신앙에 관한 자신의 이해가 풍성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제한된 개인적 시야가 넓어지고 확장되고 풍부해졌다. “나는 내 눈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 어느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는 수많은 눈으로 보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나다.”

<89쪽 중에서>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만 믿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혹은 반종교적 세계관은 그 핵심 신념들이 옳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믿음을 요구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가 주장한 것처럼, 삶에는 “이리저리 엮인 추측의 그물망”이 담겨 있다. 어떤 믿음이나 도덕적 가치를 고수한다는 것은, 그것이 증명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옳고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명하게 옳은 것으로 기분 좋게 믿었던 젊은 날의 무신론이 증거에 의거한 거부할 수 없는 사실 진술이 아니라 하나의 판단, 즉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함을 깨닫고 매우 불쾌했다.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거나 하나님의 부재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만큼 압도적인 논증은 없다. 굳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무엇이 가장 신뢰할 만한 믿음인지를 선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누구나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하는 신조를 갖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적 헌신을 숨기거나 경시하는 쪽을 선호하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알리고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55쪽 중에서>
기독교의 ‘큰 그림’은 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해 준다. 세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고 얼굴 없는 빈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시편 8편은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더없이 유려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광대하게 펼쳐지는 이 우주의 거대함에 압도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 우리를 두셨으니 이곳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표시가 찍혀 있고 박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는 그 표시들을 알아볼 수 있고, 은혜의 조명과 힘 주심을 받아 우리와 우리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올바로, 실제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세계의 중요성을 격감시키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에 갇혀서는 안 된다.
이 세계는 우리의 진정한 궁극적 목표인 또 다른 세계를 기대하게 해 준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기독교적 의미의 틀은 이곳을 잠정적 공간, 즉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장소로 보게 해 준다.

<229쪽 중에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 통찰은 죄로 물든 인류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문제의 일부인 존재가 아니라, 이 문제의 해결책이신 분이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구원자가 세상에 들어오셨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만 했다면, 십자가는 비극적 오심(誤審)이라는 관점에서, 또는 자신의 이상 때문에 처형당한 누군가의 감동적인 사례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십자가는 신적 능력의 놀라운 현현에 해당하겠지만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깨어진 인간 본성과는 어떤 접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십자가를 완전히 다른 빛 아래서 보아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인류의 이야기가 만나는 버림받은 고통의 현장이고,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키시고 소망을 주신다

<305-306쪽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을 관리 가능한 진부함이나 합리적 상투성으로 축소시키지 않도록 기독교 공동체가 절조 있게 맞선 결과물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포착하거나 표현하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조를 수정하여 그 내용을 합리적으로 다듬는 것이 하나님께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척도”(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쓰던 표현)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축소시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기를 원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부적절한 그 무엇, 하나님을 닮았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중단시키고자 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깎아내리지 못하게 막는다. 삼위일체 교리의 의도는 사람들이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락의자의 철학자들이 만든 편안한 개념으로 제한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 맞서 기독교의 풍요로운 신관을 보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제어하고 지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결국 그 교리가 우리를 제어한다.

<336쪽 중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은 교회의 신조, 역사, 실천 정보를 습득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신앙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과 성경 해석의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숙고와 수용의 과정을 이미 겪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다. 교회가 제공하는 공동체는 이런 식으로 생각함으로써, 이를테면 설교를 통해 우리 정신을 조명해 주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행동하도록 영감을 줌으로써 힘을 얻는다. 설교는 삶의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을 연결하게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관을 주입하고, 삶에서 그것을 실천할 방법을 탐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고의 모습일 때의 교회는 지혜의 공동체이고, 과거에는 확신했던 것들이 의문의 대상이 되어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을 사는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따라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교회에서 배울 수 있다.

<364쪽 중에서>
성례는 우리 개인의 이야기들이 역사와 신학이라는 두 지도를 아우르는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더 큰 것을 상징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 성례는 구성원이라는 표시고, 이야기로 빚어진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다. 우리는 출애굽과 그리스도를 통한 세계 구원 같은 위대한 사건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로 봄으로써 의미와 가치와 역사 속 위치 감각을 얻는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의 뒤를 잇는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의 대표 신학자. 옥스퍼드대학교 과학과 종교 ‘안드레아스 이드레오스’ 석좌교수이자 과학과 종교를 위한 이안램지센터 책임자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자연과학, 지성사, 기독교신학 분야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상호작용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 그는 그레셤 신학 교수이기도 한데, 이 자리는 당대의 주요 사안에 대한 신학의 공적 참여를 촉진하고자 1597년에 개설된 런던시의 공공 교수직이다.
맥그래스는 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저하게 무신론을 견지하며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사귄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삶에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회심했다. C. S. 루이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C. S. 루이스》(복있는사람)를 집필하기도 했다. 다른 저서로는 《도킨스의 신》(SFC출판부), 《인간, 그레이트 미스터리》, 《신학이란 무엇인가》,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평생 가는 길》(이상 복있는사람),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 《삶을 위한 신학》, 《회의에서 확신으로》(이상 IVP),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십자가로 돌아가라》(이상 생명의말씀사),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변증》,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이상 국제제자훈련원), 《하나님의 칭의론》(CLC), 《기독교의 역사》, 《에이딘 연대기》(이상 포이에마), 《도킨스의 망상》(살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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